
어렸을 때 TV에서 하던 헐크는 나에게 히어로물이 아니라 공포물이었다. 배너 박사의 눈이 녹색으로 변하면서 온갖 인상을 쓰는 장면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던 거다. 그리고 변신후의 녹색괴물도 무서웠다. 쫄바지 입은 근육질 아저씨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다 때려부수는데, 솔직히 그 순간엔 악당이건 아니건 그냥 박살이 날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실 그게 헐크에 대한 진실이기도하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괴물. 그것이 헐크의 본질일 것이다. 그래서, 그를 막으려는 악당들(미국 정부를 포함해서)이 아주 악당으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혹시 오해하려나 모르겠는데 나는 헐크를 좋아한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과 통제할 수 없는 힘, 이런 주제를 좋아하기 때문. 미국 코믹스중에서도 이 정도도 통제불가능한 슈퍼히어로가 전무후무하니말이다. 원작 코믹스에서도 악당들이 처치할 수 없는 이 괴물을 다른 세계로 보내버리기도 한다. 그것도 여러번. 몇년전에 끝난 프로젝트인 마블 시빌워에서는 처치곤란한 이 헐크를 친정부쪽 히어로들(즉 아이언맨과 기타등등들이) 지구 바깥으로 쫓아낸다. 이중에는 다른 행성에 가서 검투사 노릇을 하다가 제국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이야기까지 있다.
헐크의 설정은 솔직히 다른 시리즈에 비해 간단하다. '측정이 불가할 정도로' 천재인 브루스 배너 박사가 실험도중 감마레이에 쏘여서 헐크가 된 이후 쫓겨다닌다는 얘기. 분노나 공포의 감정이 극에 달하면 변신을 하게되며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헐크가 된다. 이 영화나 이안 감독이 만든 전작아닌 전작에 표현된 헐크는 코믹스의 헐크에 비하면 상당히 약소한 정도이다. 헐크는 점프로 대륙을 건너 뛸수도 있고 분노의 정도에 따라서 (이론적으로,이론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면말이지만) 무한한 힘을 낸다.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수초내에 회복가능하고 물속에 잠수할 경우 수중호흡이 가능한 조직이 폐속에 자라나기도한다. 뭐 만화니까 가능한 얘기지만 정신까지 멀쩡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그게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참고로 사촌동생에게 수혈을 해줬다가 she-hulk,즉 여자 헐크가 생기기도 한다. 그녀는 배너와는 달리 변신 후에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헐크보다도 강한 어보미네이션이 등장한다. 여기서 강하다는건 평균 힘의 크기가 헐크보다 강하다는 것이지 최대 출력이 강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즉, 헐크보다 강하긴하지만 분노에 비례해서 무한히 강해진다는 설정을 가진 헐크를 이길 정도는 안된다는 얘기. 뭐 이런저런 설정을 통해보면 마블이 직접 제작에 손 댄 작품답게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TV시리즈의 '녹색눈 장면'같은 것이라던가 감마선 사고당시의 장면에서 보여주는 장치들이 TV시리즈와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만화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블계열 슈퍼히어로 영화답게 이번에도 스탠 리 영감님이 등장해줘서 반갑다. 이젠 아주 버릇이 되어서 마블마크로 시작하는 영화는 무조건 이 할아버지부터 찾고 본다.:) 또 하나, 이안감독의 헐크에 이어서 루 페레그리노(TV판 헐크)도 또 수위로 등장해줬다. 이안판에서는 스탠 리와 함께 걸어가는장면만 보여줘서 좀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두 사람 다 제대로 보여줘서 반가웠다. 또 하나, TV판의 브루스 배너역을 했던 빌 빅스비가 출연한 TV드라마 장면도 보여줘서 그것도 조금 반가웠고.(그는 이미 1993년에 작고했다.)
영화 전체적인 구성은 마블 답게 간결하다. 쫓기다가 마지막 순간 어보미네이션이 날뛰게되자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자, 헐크가 나서서 막고 떠난다. 하지만, 잠깐잠깐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여주기도한다. 예를들어 타이틀 장면에는 중간에 헐크를 막는데 잠시동안 성공한 음파무기의 개발사 이름이 나온다. 스타크 인더스트리. 물론 마지막 장면의 모씨의 등장도 그렇고 어벤저 프로젝트를 향해서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다. 나올지 안나올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국 코믹스 팬으로선 꼭 나와줬으면 한다.
어쩌다보니 영화자체보다는 만화 얘기를 더 많이 한 것 같은데, 슈퍼히어로 영화는 복잡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크나이트같은 영화는 어쩌다 가끔 나올 뿐이고 매년 나오는 블럭버스터 액션 영화에 그런 퀄리티와 복잡성을 바랄 수도 없고 바래서도 안된다. 그냥 가볍게 볼만한 때려부수는 영화가 뭐가 나쁘단 말인가....뭐 나쁘다고 주장하고프면 할수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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