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란 무어 원작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나 역시 우려반 기대 반이었다. 설사 아주 잘 만들어져서 나오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흥행하긴 힘들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원작의 정치 사회적 배경지식을 우리나라 관객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것이 있었고 미국이 졌다는 사실은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을까? 다른 이글루를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 영화가 지루했다는 평도 꽤 많았다. 난 그들을 탓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인을 위해 만든 영화이며 미국인이 만든 영화이다. 당연히 관객을 미국인으로 상정해놓고 있다. 긴 타이틀롤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을 무엇을 알고 있을까? 코메디언이 JFK암살범이라는 것이 왜 놀라운 일일까. 팻 뷰캐넌과 리 아이아코카를 보면서 낄낄대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결론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거라는 예상이었다. 당연한 얘기다.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 7~80년대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필요하다.
내 기준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친절한 영화였다. 유명한 인물들을 보여주며 영화속의 평행우주가 어떤 세계인지를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딱 한가지가 빠져있긴하지만 말이다. 그건 바로 가면쓴 영웅들이 어째서 그만두게 되었는지말이다. 킨법안에 대해서 자세히 안나온 것은 왠지 '아, 까먹었다!'하고 빼먹은 것처럼 보인다. 설명을 하자면 히어로들 때문에 경찰들이 반발, 파업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도시의 치안은 더욱 나빠지게된다. 시민들은 모두 히어로들을 탓하게되고 영화에 나온 것처럼 항의를 하게된다.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자경단(Vigilante)의 전통이 있어온 나라이다. 지금도 여러주에 걸쳐서 무장 사병조직들이 존재하며 이는 불법이 아니다.(물론 감시를 받거나하긴 하겠지만말이다. 특히 유나바머 사건 이후로 말이다.) 서부시대이전부터 치안이 존재하지도 않던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기가 총을 들고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이 자경단의 다른 모습들이다. 그래서, 미국 만화는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뛰어난 어떤 인물, 즉 히어로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슈퍼히어로들을 정말로 현실에 등장시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슈퍼맨은 이 영화 왓치맨에서 나오는 닥터 맨해튼처럼 국가 안보에 중추역할을 맡게 될 것이고 전쟁에 선봉에 서게 될 것이다.(특히 그의 모든 가족과 친구와 직장이 미국에 있으며 사실 그다지 똑똑하지도 않은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말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지구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행성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좀 더 양심있는 척하는 정치인이라면 속국으로 바꾸겠고 말이다.
이래서 슈퍼히어로들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존재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다. 자경단이 결국 KKK단으로 변했듯이 인간의 흔들리기 쉬운 감정과 한정된 지능과 지식을 가진 존재가 아무런 견제(watch)도 받지 않고 남을 심판하는 일을 하게된다면 반드시 타락하기 마련이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여러 리뷰에서 거의 항상 나오는 얘기가 있었다. 바로 자지다. 맞다,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며 달려있는 그 파란색 자지. 그걸 좀 가리면 안되겠니?라고 하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 혹시 베트남전 장면을 기억하는지. 닥터 맨해튼은 팬티를 입고 베트콩들을 학살한다. 코메디언이 불쌍한 여인을 사살하는 장면에서 코메디언의 말 대로 그는 총을 증발시키거나 무슨 수를 쓰던간에 막을 수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까지도 팬티를 입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그냥 안입고 다닌다. 그가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냐면 그건 아니다. 인터뷰에는 정장을 입고 나갔으니까. 그러나,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며 인간에 대해 신경도 안쓰게된 것일 뿐이다. 영화속 대사처럼 '인간은 지능있는 흰개미'정도의 존재일 뿐이다. 누구도 흰개미가 쳐다본다고 꺄악소리를 지르며 성기를 가리지 않는다. 그에게 우린 그저 벌레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가장 많이 다가가는 인물은 로어샤크일것이다. 자막에 참 불만이 많았는데, 로어샤크와 로르샤하(테스트의)가 같은 단어라는 것을 알릴 방법이 없었을까? 뭐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로어샤크는 이 작품의 화자이며 주인공이다. 오로지 그만이 예전에 하던 왓치맨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그래도 쥐새끼는 잡아죽여야한다. 그것이 로어샤크의 사상이다. 만약 6살짜리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을 보고 아무런 감정없이 범인을 '체포'해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난 생각한다. 그는 그래서 가장 비인간적으로 쥐새끼들을 고문할 수 있으며 가장 비인간적으로 인간들을 죽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비인간성이야말로 인간성에 내재된 정직한 폭력성이기때문이다. 또한 그의 굽히지 않는 신념을 존경하지 않을수도 없다.
그는 벌레같은 인간을 증오하며 빨갱이와 리버럴들도 증오한다. 수시로 변하는 마스크는 가슴 속을 너무나도 꽉 채우고 있는 증오가 삐져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또하나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듯이 증오는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이 모든 것의 해결책일까? 그건 아니다. 오지멘디아스가 한 일은 세상을 사랑과 평화로 가득찬 곳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파란색 반신-반인간에 대한 공포로 모두 얼싸안게 만든 세상이다. 아, 난 비판하려드는 것이 아니다. 난 그가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원작과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는)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오지멘디아스가 바보같은 닉슨을 쫓아내고 소련에 유화적인 사람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 스스로가 대통령이 되었다하더라도 닥터 맨해튼이 존재하는 한 힘의 불균형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정치인이 누가되던, 힘의 불균형이 유지되는한 불신 또한 계속 유지될 것이고 소련의 서기장이 고르바초프가 된다하더라도 소련체제는 여전히 유지될 것이다. 인간들이 굶어죽건말건말이다. 그리고 둠스데이 클럭은 계속 12시를 향해 갈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 얘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정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촘촘히 짜여진 그물처럼 되어있으며 그 그물을 가장 많이 물결치게하는 것이 정치이다. 정치는 국회에서 싸움질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일 수도 있고 경제적 파국이 문제가 될수도 있으며 낙태나 인종이 문제가 될수도 있다. 수많은 정치적 문제들 중에는 보통 정치적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종교가 그렇다. 미국에서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될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라. 미국은 흑인이 대통령이 되긴했지만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될 준비가 되진 못했다. 앞으로 긴 세월동안 계속 그럴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정치이며 정치적 이슈이고 아니라면 정치적 문제로 만들어야만 한다. 냉소적인 비웃음을 짓는 것도 좋지만 그 비웃음 또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정치적이라는 것, 그것은 이 세상이 지옥이며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아끼고, 고치고, 때로는 싸워가며 지키는 것, 그것이 정치이다.
왓치맨은 그래서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이슈는 극미화되어 한 개인의 인생을 뒤흔들 수도 있다. 반면 정치적인 이슈는 온 인류를 뒤흔들수도 있다. 킨 법안때문에 거세당한 가면쓴 히어로들은 결국 세상이 시궁창이 되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가 무슨 일인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군상들을 여러 스펙트럼으로 보여준다.
기나긴 독백은 이만해두고, 그래서 이 영화는 그 스펙트럼들을 잘 보여줬을까?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캐스팅은 거의 완벽했고, 연기 또한 흠잡을데가 없었다. 자신이 죽어야만하는 이유를 사실 납득하고 있는 옹고집쟁이 로어샤크의 눈물, 코메디언의 비열한 웃음, 무기력한 나이트아울(둘 모두), 세상에 아무 관심도 없어보이는 실크스펙터(역시 둘 모두),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초연한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을 뿐인 닥터 맨해튼. 물론 그는 그래픽이긴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이리저리 뜀박질을 하며 원작이 닦아놓은 길을 그대로 달려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는 스토리를 대폭 뜯어고쳐서 좀 더 단순하고 간명한 영화를 만들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 자신이 왓치맨의 팬인 듯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칭찬받을 일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액션을 생각하고, 스파이더 맨이나 기타등등 슈퍼히어로물처럼,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잘못 찾아왔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정치적인 영화이며 그러기에 가벼운 액션 영화를 찾은 사람들에겐 너무 무겁고 지루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정하지는 않는다. 내 기준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친절한 영화였고 더 이상 친절하게 만든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나오는 도중에 실존인물이 나올때마다 누구인지 설명해야할 의무는 영화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에게 없다. 못알아본다면 관객탓이고 알아본다면 관객덕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원작재현율도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원작팬들중에서는 오지멘디아스의 단선적인 캐릭터에 불만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던데, 맨 마지막에 눈물을 조금 흘린다고 2차원적인 캐릭터가 3차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라는 것을 '제대로' 형성하려면 길고 많은 시도가 필요하며 오지멘디아스는 솔직히 원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리고 원작이 드러내고자하는 바, 즉 주제도 이정도면 큰 무리가 없이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고 심판하나', 그리고 '세상에 슈퍼히어로가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망할까?'하는 것 말이다. 비쥬얼은 적절했지만, 초반에 슬로우모션이 많이 나와서 조금 짜증이 났다. 난 슬로모션을 쓰는 액션 자체를 싫어하기때문에 좀 더 엄격한 편인데 그래도 슬로모션만으로 만든 매트릭스따위의 쓰레기보단 훨씬 나았다. 적어도 중반 이후엔 별로 등장도 안하는 기법이었으니까. 물론 액션 자체가 드무니까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원작의 깊이와 21세기 영화기술의 타협을 적절하게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이 영화에 별점을 짜게 주고 싶지 않다.
별점: ***1/2(4개만점.)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 현실속의 슈퍼히어로-왓치맨 by myungworry
- 왓치맨 - 알란 무어 / 정지욱 by hansang
- 왓치맨 (Watchmen, 2009) : 버겁지만 충분히 진지하다 by fatman
- 왓치맨 (그래픽 노블 원작 영화) by 밀피
- 왓치맨에 대한 간단한 설명 by RoyalGuard




